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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그냥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유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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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내 어릴 적 꿈은 건축가였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아래는 내가 2008년, 그러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린 그림이다. 졸라맨들이 짓고 있는 어떤 요새의 입면도인 것 같아 보인다.

 

무슨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비슷한 그림이 있는 그림책을 보고 비슷하게 따라 그리던 기억이 난다. 일단 그림부터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 그린 그림 치고는 뭔가 꽤 '건축틱'하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비밀이 있다.

 

비밀이래서 뭔가 거창한 것은 아니고, 당시에 내가 기름종이라고 부르던 반투명 종이를 이용해 그렸다는 것이다. 왼쪽 그림에 오른쪽 기름종이 그림을 덧대면 가장 위의 그림이 완성된다. 왼쪽 그림은 건물의 외부 모습이고, 오른쪽 기름종이 그림은 건물의 내부를 나타냈다. 초등학생이던 내가 어디서 보고 따라한 건지 흔히 미술가나 건축가들이 도면을 그릴 때 사용하는 '트레이싱 그림'을 그린 것이다.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용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건축 도면에서의 트레이싱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난 어려서부터 저런 건물을 그리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어머니의 말로는 내가 연필을 잡기 시작한 3~4살 때부터 꼭 집 그림을 하루에 하나씩 그렸단다. 입체로 그린 대단한 집 같은 건 아니고 초록 땅 위에 놓인 네모난 집과 파란 하늘 이 정도였단다. 그때부터 이미 건축가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진 기차를 굉장히 좋아했었다. 매일 기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고, '지하철은 달려온다'라는 인포그래픽틱한 그림책을 하루에도 몇 번씩 봤다. 

https://brunch.co.kr/@moonyment/9 어떤 분께서 소개해놓은 해당 그림책이다. 아무튼 단지 기차 자체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지하철 노선도와 철로, 기찻길, 특히나 철교의 이미지를 굉장히 좋아해서 당시엔 그런 그림을 매일 그렸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1학년 혹은 2학년때 그린 동네 지도

위 그림은 초등학교 1학년 혹은 2학년 때 그린 당시 우리 아파트와 근처 동네의 지도이다. 우리 동네가 너무 좋아서 그렸던 것 같다. 창문을 내다보며 보이지 않는 곳들을 상상하며 그린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잘은 모르지만 건축에서 말하는 배치도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초등학교 고학년때 그린 걸로 추정되는 알 수 없는 설계도
역시 초등 고학년 추정, 화장실 배수관?

초등학교 중고학년이 되어서는 그림을 그리는 빈도가 어려서보다 적어졌지만, 그래도 꽤 자주 그렸다. 아래 <건물을 잘 그리는 스케치북> 같은 스케치북에 건물을 무작정 따라 그리던 시절이었다. 아래 국제 무역센터 그림 같은 경우 초등학생 땐지 중학생 땐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비전공자 기준 지금 그렸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수준이란 생각이 든다. 스케칭이란 걸 단 한 번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주제를 알 수 없는 그림들도 그렸나 보다. 그린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런 그림들이 꽤 남아있다.

 

조금 허접한 조감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중학교를 진학하고부터는 그림 그리기보다 나의 관심을 끄는 유흥 매체들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에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예고 진학을 잠시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생각에 그치고 말았다.

 

2011년 8월 중학교 1학년, 여름마다 놀러 갔던 어떤 집의 평면도
2011년 8월 중학교 1학년, 수중 벙커 투시도

그래도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가끔 그리곤 했었나보다. 위 그림 두장이 중학교 1학년때 그린 그림이다. 연필로 워낙 희미하게 그려서 사진상으로 보이려나 모르겠다. 첫 그림은 말 그래도 건물의 건축 평면도이고, 둘째 그림은 어떤 상상 속의 수중 벙커의 3차원 투시도이다. 누가 그리라고 한 것도, 그리면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재미로 그렸다. 첫째 그림 속의 건물은 아버지 친구분의 별장인데, 매 여름마다 놀러 갔었고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 차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저렇게 기억에 의존해 평면도를 그렸다. 물론 당시엔 내가 '평면도'라는 걸 그리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냥 무작정 그런 거지.

 

그렇게 예고를 포기하고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 후 학업에 열중했지만, 역시 가끔 그림을 그렸다. 아래 그림을 보면 공부하기 싫을 때 그렸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교실에서 그림을 그리면 친구들의 호응이 꽤 좋았기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 같은 걸 자주 그렸으나, 아쉽게도 교실 어딘가에서 분리수거되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자습실

  재미있게도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딱히 진로에 대한 목표가 없었던 나는 막연하게 건축학과로 목표를 설정했다. 그 당시의 나도 내가 그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건축학과는 취업 잘 안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당연히 난 원서를 '유망한' 공학과들에만 넣었다. 그렇게 흥미와 적성은 뒤로한 채 소위 취업이 잘된다는 '전화기'중 하나인 기계공학과로 진학을 했다.

 

 

  난 아직 대학생이고 아직 명확한 진로를 설정해놓진 않았지만, 이렇게 내 삶의 행적을 얇게나마 훑어봤을 때 내 관심 분야는 항상 정해져 있었던 듯싶다.

 

  크게 본다면 응용 미술이고, 좀 더 세부적으론 건축 혹은 설계가 바로 그것이다. 

 

  다행히도 설계와 크게 멀지 않은 기계공학과로 진학을 했고(물론 성적에 맞춰서 갔지만), 나름 만족스럽게 학교 공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아쉬운 것이 두 가지 있다면, 첫째는 예고로 진학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던 것이고, 둘째는 건축학과로 진학하지 않은 것이다. 첫째 아쉬움은 산업디자인과 혹은 시각디자인과를 복수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으며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건축학과로 진학하지 않은 아쉬움은 아직도 크게 남는다. 그리고 그 아쉬움에 불일 지핀 것이 바로 유현준 교수님의 책들이다.

 

 

  서론이 참 길었다. 군 복무 중 유현준 교수님의 <어디에서 살 것인가>를 읽었다. 책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이 많은 줄은 알지만, 그래도 나 같은 건축 문외한에게 '건축'이라는 요소가 우리의 삶에 이토록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엔 충분한 내용들이었다. 책을 읽으며 난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그래도 건축학과를 목표로 했었다는 놈이, 건축에 대해 이렇게나 모르고 있었다니. 그리고 최근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집어 들었고, 이틀 만에 다 읽어버렸다.

 

  특히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도시에 관한 내용이다. 위의 몇 가지 그림들에서 알 수 있듯이, 난 무의식적으로 어떤 것의 구조를 파악해 그걸 그림으로 나타내기를 좋아한다. 유현준 교수님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분석했다. 서울은 내가 태어난 곳이자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곳이고, 지금은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애착이 깊게 든 도시이다.

  서울 말고도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도시가 두 곳 더 있다. 한 곳은 인도의 바라나시이고 다른 한 곳은 프랑스 파리이다. 두번의 유럽 여행을 하며 세계적인 도시인 파리와 런던을, 그중 특히나 파리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궁금했다. 왜 서울에서보다 런던에서 더 걷고싶을까? 그리고 왜 런던에서보다 파리에서 걷는 즐거움이 더 컸을까? 단순히 문화 사대주의를 떠나, 파리에는 나를 걷고 싶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라나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교수님의 두 권의 책을 읽으며 그 이유를 깨달았다.

 

  한마디로 서울은 '휴먼 스케일'과는 너무 다르다. 모든 것이 너무 큼직큼직한 것이다. 서울의 대표적 공원인 서울숲은 강변북로와 내부순환로라는 커다란 도로로 둘러싸여 있고, 테헤란로와 광화문 광장엔 너무나 커다란 도로가 있다. 대표적 멀티플렉스인 코엑스의 근처엔 너무 커다란 건물들이 즐비해있다.

  반면 파리엔 애초에 높은 건물을 찾기가 힘들다. 어디에서나 하늘이 보인다. 또한 서울의 광화문 광장과 비견될 만한 샹젤리제 거리엔, 양 옆으로 정말 엄청 넓은, 차도만큼 넓은 도보가 있다. 특히나 도시 곳곳에 자그마한 녹지들이 있고, 그 근처엔 파리의 상징인 노천카페들이 있다.

  바라나시도 비슷하다. 사람이 접근하기 다소 애매한 한강변과는 달리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은 도심(?)과 붙어있다. 바라나시의 골목길에서 나오면 바로 갠지스강이 보인다. 갠지스강변에서 화장하는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며 생각이 잠길 수도 있고, 강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들, 몸을 씻는 사람들, 강변에서 크리켓과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들 등 '이벤트 밀도'가 정말 높다. 그리고 골목길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다. 정말 꼬질꼬질하지만 사람 사는 흔적이 이곳 저곳 듬뿍 묻어있는 골목길. 

  그나마 서울에 있던 휴먼 스케일의 건축들도 없어지는 추세이다. 달동네와 골목길이 바로 그것인데, 위 지도 그림의 동네인 서울 성북구에 살 때 정릉 주변으로 그리고 아리랑 고개 주변으로 달동네들이 정말 많았다. 아파트에 사는 우리에겐 미로같은 달동네의 골목길들이 최고의 놀이터였고, 집에서 꽤 멀었음에도 굳이 거기까지 가서 그 골목 사이를 뛰놀며 놀곤 했다. 하지만 내가 중학생 때쯤 그 달동네는 모두 없어져버라고 재개발되어 이젠 삭막한 아파트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있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또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이 있는데, 바로 학교에 관한 이야기이다. 학교 건축이 너무 정적으로 설계되어 있어 12년이나 생활하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창의력을 억압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학창 시절 때 내가 항상 느끼던 바 그대로가 책에 훨씬 자세하게 서술되어있어 너무 반갑고 기뻤다. 학교 건물이 바뀌면 교육이 바뀔 것이고, 교육이 바뀌어야 비로소 사회가 바뀔 것이다.

 

  이러한 비교 분석들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엄청난 흥미를 느꼈다. 교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건축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가 더 좋은 건축 속에서 살 수 있고, 세상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말이다. 이 책 두 권을 읽고 나도 건축을 배워 세상을 바꾸는 일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운이 좋게도, 유현준 교수님이 홍대에 재직중이셔서 홍대생인 내가 유현준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오래전부터 내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건축이라는 흥미를 펼쳐보고 싶다. 지금이라도 건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난 아직 어리고 시간은 많으니, 그 방법에 대하선 더 차근차근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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