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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그냥영화

영화 <인투 더 와일드>, 이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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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부터 이 영화를 보려고 했다.

  결국 어제 책상에 앉았다. 영화를 보는 것도 생각보다 집중력이 많이 필요하다. 집에서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면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집중하기가 생각보다 힘이 든다.

 

  주인공 크리스는 인간 사회에 염증을 느낀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불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공부는 잘한다. 미국 명문대에서 수석으로 졸업하는 등 자신이 염증을 느끼는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크리스는 친구가 없다. 유일하게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여동생 캐린 뿐이다. 크리스는 사회적 유대의 결핍을 문학 작품으로 채워 넣는다.

  이렇게 볼 때, 크리스는 지극히 이상주의적이다. 이 사회는 무엇인가 잘못되었고 답을 찾을 수 있는건 문학 속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주의의 연장선에서, 크리스는 문학을 넘어 자연 속으로 편입되려 한다. 자연이라는 이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이렇게 사회와는 담을 쌓고 이상주의의 사슬로 본인을 속박한 채 살아가는 크리스이지만, 의외로 여행 도중 만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건전한 삶의 가치를 불어넣어 준다.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교통사고로 부인과 자식을 잃고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는 한 할아버지에게 다시금 삶의 열망과 목표를 깨우쳐주고, 이혼한 뒤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와 히피로서 삶을 살고 있는 여인의 가슴속에 무언가 다시 불을 붙여주고, 어린 히피 소녀에겐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

 

  재미있는 점은 크리스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사람이라는 것이다. 잠시 동안 함께 일하며 친분을 나누는 농장 주인에게는 무엇인가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농장 주인은 이미 사회 속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기 때문일까.

  아무튼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발버둥 치며 사회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 크리스가, 이미 사회에서 스스로를 배제시킨 사람들에게 다시 사회로 돌아갈 어떤 희망 혹은 가능성 비슷한 무엇인가를 준다. 크리스에게 자신들의 과거가 비추어져 보였던 것일까? 하지만 아무도 알래스카로 향하려는 크리스를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응원해준다. 자신들은 끝내 찾지 못한 무엇인가를 크리스가 알래스카에서 찾아와 돌아오길 기대했을까?

 

  고등학교 3학년 때 힘든 시기를 보냈다.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양의 공부를 소화하기에도 벅찼는데 하필 그때 가정에 불화가 약간 발생했다. 지금에서야 다 지난 일처럼 느껴지지만, 당시엔 정말 힘들었다. 나도 막연하게 다 그만두고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회로부터의 철저한 고립이라는 극한의 상황까지 자신을 밀어붙여가며 고뇌하고 힘들어하는 크리스를 보며 누군가는 절대 이해 못할 수 있지만 난 그의 일탈이 절실히 와 닿았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10여 년 가까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다 버려두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나 싶다. 자연인들처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는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말이다.

 

  현실에 치어 살다 보면 이상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스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강물이 범람해 자연 속에 갇힌다. 그리고 '행복은 나눌 때 비로소 존재한다'는 유언 아닌 유언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죽을 때 보이는 장면은 다름 아닌 과거 행복했던 부모님과의 추억. 그토록 멀어지고자 노력했던 것이 임종 직전 크리스의 가슴속에 떠오른 것이다. 크리스가 자연 속에서 찾으려 했던 '이상'은 사실 그렇게 멀리 존재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헛되이 죽지 않았다. 여행 중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나누어주었고, 크리스의 실종 이후 항상 싸우기만 하던 부모님의 관계가 조금씩 좋아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크리스는 죽기 전에 가장 소중한 가치를 깨달았다. 잘못 먹은 식물의 독으로 몸은 고통스러웠겠지만, 마음만은 편안했을 것 같다. 

 

  진짜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자그마한 행복들을 찾고 그 행복을 음미하며 살아가는 삶이 이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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