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국에 조심스럽지만 조용히 제주도에 갔다 왔다. 여름처럼 오래 있을 작정은 아니었고 서핑이 너무 하고 싶었다. 날씨가 안 좋거나, 너무 춥거나, 바람이 너무 많이 불거나, 파도가 없어서 서핑은 이틀밖에 못 탔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서핑이 아니라 한라산이다.
2월 4일 목요일 다행이 날은 정말 좋았다. 근데 날이 좋다고 백록담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처음 갔을 때 날은 정말 좋았지만 백록담에만 안개가 짖게 껴있었다. 두 번째 갔을 땐 올라가는 길은 조금 흐렸지만 정상 부분은 정말 말끔했다. 그리고 이번이 3번째.
7시 34분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판악 휴게소를 출발했다.
2021/02/10 - [여행/여행정보] - 한라산 등반 정보 :: 코스, 계절별 옷차림, 장비, 숙소 등
아직까진 발걸음이 가볍다. 백록담 부근에 가면 코스 난이도가 급상승할 걸 알기 때문에 초반에 무리해서 거의 뛰어 올라가다시피 했다.
아직까진 아이젠을 안 꼈다. 눈이 안 덮인 데크 구간도 많았고 눈이 두껍게 쌓여있지 않아 아이젠을 차면 발목만 아플 것 같아서 그냥 맨발로 올랐다.
여름에 왔을 땐 두번 다 관음사로 올라가서 성판악으로 내려갔었다. 사실 이번에도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이름을 헷갈리는 바람에 그냥 꼼짝없이 성판악으로 올라가게 됐다. 뭐 잘 됐다. 이 기회에 가보는 거지!
경치는 아름다워지지만 슬슬 내 발걸음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쌓여있는 눈이 정말 많이 거슬린다.
사실 성판악 코스의 끝자락 백록담과 마주하는 부분은 여름에 보아도 정말 아름답다. 근데 본체는 겨울이었다. 힘들어서 진짜 숨을 헉헉거리는 와중에 와~~~~~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마지막쯤엔 길이 꽤 위험해서 정신 똑띠 차리고 올라갔다.
사진상으로 길이 정말 위험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도 위험했다. 근데 사실 이 길은 여름엔 아래와 같은 길이다.
이렇게 조금 가파르긴 하지만 위험하기보단 힘든 쪽에 가까운 그런 길인데, 눈이 많이 쌓여서 계단이 덮여버려 급기야 위험한 길이 되어버렸다. 겨울 산과 여름 산이 이렇게 다르구나 느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한 방향으로만 기울어진 눈꽃.. 징그럽고 기괴하면서도 신기하고 아름답다.
백록담에 도착하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정상에 구름이 없다!!!
10시 30분, 출발 3시간 만에 백록담에 도착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물 고인 백록담은 여름이 이미 봤으니 됐고, 그냥 어떤 모습일까 너무 궁금했었다.
백록담은 기대 이상이었다...
백록담에 사슴이 정말 산다고 하면 몇몇 사람들은 농담하지 말라고 그런다. 근데 산다. 여름에 내가 직접 봤다. 나도 장난일까 반신반의했는데 내 눈으로 직접 봤다.
다행히 내가 정말 빨리 올라와서 다행이 백록담 필수코스인 사진 대기줄이 1명이었다. 여름에 왔을 땐 줄만 40분 넘게 기다렸다. 그땐 친구들과 같이 와 속도를 맞추며 걸어 12시가 다 되어서야 백록담에 도착했었다.
사진을 막 찍고 있는데 이제 5년 차 내 늙은 아이폰6S가 극심한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배터리 70%에서 꺼져버렸다.
20분 동안 멍 때리며 백록담 바라보다가 너무 추워서 호다닥 내려가기 시작했다.
9월에도 백록담은 꽤 추웠다. 겨울 날씨였다 그때도.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체감온도가 아마 0도대로 떨어졌던 것 같다.
2월의 백록담은... 상상 이상으로 추웠다. 땀이 마르며 체온이 엄청 떨어졌고 바람이 말 그대로 칼바람이다.
암튼 10시 55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관음사 코스에 볼거리가 훨씬 많다. 겨울엔 어떤 모습일까 기대하며 하산 시작.
슬슬 지치고 사진 찍기도 귀찮아져서 삼각봉 이후로는 사진이 별로 없다.
8월에 혼자 갔을 땐 06:40에 관음사에서 시작해 10:40에 백록담에 도착했고 13:40에 성판악에 도착했다.
이번엔 기록을 훨씬 단축했다.
07:30에 성판악에서 출발해 10:30에 백록담 도착, 하산 1시간 10분 만에 관음사에 도착했다.
누군가랑 같이 오는 건 그대로 맛이 있고 혼자 오는 것도 이대로 맛이 있는 것 같다. 혼자 두 번, 같이 한 번 올랐다. 이번에 오르며 그 때 같이 올랐던 길과 장소, 추억들을 떠올리며 걸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다음엔 누군가랑 같이 올라가야겠다. 또 추억을 만들어야지.
빠르게 올라갔다가 빠르게 내려왔지만 경치는 즐길 만큼 즐겼다. 솔직히 성판악 마지막쯤에 너무 아름다워서 감동의 눈물 찔끔 흘렸다. 그 경치는 도저히 사진으로 담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스위스보다 아름다운 곳은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웬걸... 느낀 감동 수치가 스위스때와 비등비등했다.
눈 때문에 한 발 한 발 나아가기가 예상보다 힘들었고 땀 조절하기도 어려웠지만 고생해서 올라가는 값어치가 있는 것 같다. 이제 아마 제주도 갈 때마다 한라산 등반을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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