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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영화

<위대한 개츠비> 책과 영화,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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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책을 이틀 만에 읽어버렸다. 바로 <위대한 개츠비>.

 

학창 시절 동명의 영화를 영화관에 가서 본 기억이 있는데, 기억나는 것이라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이 출연했다는 것, 그리고 굉장히 몽환적인, 영화 <빅피쉬>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였다는 느낌뿐이었다. 왜냐하면, 별로 재미가 없었다.

 

영화를 본 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다가 소설 원작 영화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알라딘 중고서점 강남점으로 달려가 책을 샀다. 그때 난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아쉽게도 책에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얼마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당시 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재미도 없고 따분한 미국 상류층의 문화를 다룬 소설은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나 보다.

 

그렇게 책장에 꽂혀 먼지만 쌓여가다가, 지난 토요일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 읽고는 <위대한 개츠비>가 떠올라 그날 밤 바로 읽기 시작했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위대한 개츠비>처럼 학창 시절 읽어보려다 실패한 책이었고, 이제 완독에 성공했으니 개츠비도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저자를 보니 다름 아닌 스콧 피츠제럴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온 실존 인물들 중 하나로, 영화를 보며 도저히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어 한 명 한 명 찾아보다가 알게 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마침 책 앞에 소개된 사진이 <미드나잇 인 파리>의 피츠제럴드와 똑 닮아 바로 기억이 났다.

 

로키가 아니라 스콧 피츠제럴드

아무튼 토요일 밤에 책을 집어 들어, 일요일 밤에 다 읽었다. 중학생 때와는 달리 영화와 책, 인터넷 등을 통해 여러 방면의 미국 문화를 접했고 익숙해졌기에 읽기가 그때보다 훨씬 수월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늘어난 배경지식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었다.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는 <호밀밭의 파수꾼> 직후에 읽어서 그런가, 무엇보다도 기승전결이 너무 또렷이 느껴졌다. 초반엔 '대체 이게 뭐지' 싶다가 닉(토비 맥과이어 분)과 제이(개츠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가 만나 친해지는 순간부터, 그리고 제이와 데이지의 관계가 밝혀지는 순간부터는 손에서 책을 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완독 한 뒤 다음날인 월요일 바로 영화를 봤다. 사실 이미 재미가 없었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있어서 큰 기대는 안 했다. 영화 자체로는 그저 그런 무난한 영화였으나 아쉽게도 나는 원작 소설을 읽은 바로 다음날 영화를 봤기 때문에 책과 자꾸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훌륭한 원작을 보기 좋게 망쳐놓은 듯 한 영화였다.

 

먼저 데이지 역의 '캐리 멀리건'... 이 배우의 연기력과는 무관하게 소설의 '데이지 뷰캐넌'이라는 캐릭터와 너무 안 어울리는 캐스팅인 것 같다. 소설의 데이지는 단순하지만 아름답고 발랄(자신의 딸이 자기처럼 이쁘고 멍청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하다. 매 장면 데이지가 내뿜는 긍정적이고 순수한(사실은 순수해 '보였던') 에너지는 나까지 기분이 좋게 만들었다(중후반부는 제외하고 말이다).  아쉽게도 영화에서 그려지는 데이지는 뭔가... 항상 고뇌하고 생각이 깊으며 속을 알 수 없는 그런 이미지이다. 배우의 어딘가 진득해 보이는 이미지에 연기까지 그렇게 해버리니 영화가 축축 처지고 지루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뭔가 데이지가 나올 때마다 가슴히 갑갑해졌으며 빨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반지의 제왕 3편에서 프로도와 샘의 장면이 보기가 껄끄러웠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데이지

 

그리고 위 사진처럼 웃거나 말을 할 때 입이 살짝 삐딱(?)하게 돌아가는 걸 볼 수가 있는데, 정말 유감이게도 이 입은 드라마 <선덕여왕>의 덕만(이요원)의 입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왜 유감이냐하면 내가 덕만을 너무도 싫어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봤을 때 배우 이요원은 선덕여왕이라는 캐릭터와 너무도 안 어울렸을뿐더러 뭔가 연기도 잘 못하는 것 같았다. 너무 답답한 캐릭터였다. 그런 덕만도 '삐딱한 입'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딘가 영화 속의 데이지와 비슷한 느낌이다. 항상 고뇌하는 것 같은... 그런 이미지. 게다가 자신을 열렬이 사랑하는 한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입이 삐뚤어져서 싫다는 게 절대 아니다. 그 입을 보고 싫어했던 덕만이 떠올랐고 때문에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캐릭터가 더 마음에 안 들게 된 것뿐이다.

 

아으...
조던 베이컨

 

다음으론 데이지의 친구 조던 베이컨. 엘리자베스 데비키라는 배우가 분했는데, 특유의 도도하고 차가윤 이미지 덕분에 소설의 베이컨과 찰떡같이 잘 맞이 떨어지는 캐스팅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베이컨은 왜 나온 걸까? 내 말은, 원작에선 꽤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주인공 닉과의 러브라인이다. 그 미묘한 러브라인과 자동차 사고 이후 한순간 닉에게서 돌아서는 모습을 통해 결국 닉의 회의감을 가중시키는 중요한 '장치'로서 작용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닉과의 러브라인은 쏙 빼먹은 채 그냥 도도하고 파티를 즐기는, 그러다가 데이지와 제이 개츠비가 재회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시시한 역할로 그려졌다. 영화 초반부터 꽤나 중요할 것 같이 비쳐주다가 말이다. 아쉬웠다. 이럴 거면 그냥 아예 빼버렸어도 됐지 않았을까 싶다.

 

여담으로 조던을 보고 처음엔 에밀리아 블런트인 줄 알았다. 묘하게 닮았다.

 

 

Who said you could talk to me?

이 영화가 잘못되어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초반 톰 뷰캐넌이 닉을 파티에 데려가는 장면부터이다. 영화에선 뜬금없이 여자가 닉에게 키스하는 등 무슨 난교파티를 한 것 마냥 찍어놨는데, 책엔 그런 내용 전혀 없다. 톰이 외도하는 것은 아주 은연중에 묘사하긴 하지만 선정적으로 그려진 장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소설 속 닉은 파티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다. 반면 영화에서는... 아주 그럴싸하게 난교파티로 만들어버렸다. 소설에서 묘사된 닉의 세심한 감정선을 150분짜리 영화에서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였나?

 

막장 난교 파티

 

가장 당혹스러운 장면은 바로 '레이징 장면'이었다. 톰이 데이지와 제이의 관계를 눈치채고 다 같이 뉴욕으로 가는 장면에서 뜬금없이 레이싱을 펼친다. 애초에 소설엔 이런 장면이 없을뿐더러, 소설의 전반적인 잔잔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맞지 않는 장면이었다. 물론 소설을 영화로 각색할 때 무조건 책과 똑같이 만들라는 법이 없긴 하다만 그럼에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톰과 제이의 자존심 싸움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은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함이라기보단 그냥 유치한 애들 장난처럼 느껴졌다. 너무 유치하게 다가와 제이 개츠비의 숭고한 사랑보다 오히려 불륜의 치졸한 면을 부각하는 듯했다. 이마저 감독의 연출이었을까?

 

역시 이번 영화에서도

거의 바로 이어지는, 제이가 자신의 과거를 데이지 앞에서 들추어내는 톰을 향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호통치는 장면. 개츠비의 뒷배경을 부각하기 위함인 건 이해가 되지만, 또한 영화의 특성상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해야 했던 것도 이해가 되지만... 소설을 읽고 보는 나로서는 심히 당황스러웠다. 

원래는 데이지를 향한 제이의 순결하지만 불안정한, 애처로운...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감정선으로 그려지는 장면인데 말이다.

 

하지만 제이의 호통 장면을 통해, 오히려 돌아갈 때 제이과 데이지 둘이 돌아가게 먼저 제안하는 등 차분하고 담담히 상황을 헤쳐나가려는(?) 톰의 모습이 더 살아났 건 사실이다. 이러한 대조적인 모습이 그들이 가진 출생부터의 차이를 보여주었고 나아가 닉이 느끼는 회의감을 효과적으로 부각하는 데 성공했다.

 

책엔 이런 거 없다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건 톰 뷰캐넌뿐인데, 그의 작중 행적과는 무관히 소설과 가장 비슷하게 그려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칠면서도 톤이 높은 허스키한 목소리가 성깔 있다는 느낌을 더해 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 경멸하는 태도가 깃들어 있었다."라고 묘사되는 톰. 영화에서도 찰떡이다.

 

연기력을 따져보자면 데이지 역의 캐리 멀리건 빼고는 모두 훌륭했다. 이 배우는 연기를 못한다기보단 배역에 너무 안 어울리는 마스크를 가진 것 같았다. 디카프리오에선 자꾸 울프오브월스트리트가 보이고 맥과이어에게선 자꾸 스파이더맨이 보였지만.

 

역사적 배경

작중 시점은 1922년이다.

정말 간단하게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면, 1920년대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 세계가(특히 미국이)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사회 모든 방면에서 급발전하던 시기이자 미국이 유럽을 뛰어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발달한 이러한 모든 것들은 현대와 매우 직결되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근대를 넘어 '현대'라는 시대를 규정짓는 특징들은 대부분 이 때 생겨난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그 다방면에 걸친 폭발적 발달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기술과 의식의 성장 속도의 괴리에서 오는 이러한 모순은 계속 안으로 쌓여만 가기를 거듭한다. 결국 이 축적된 모순은 1929년 대공황, 더 나아가서는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일그러진 형태로 일순간에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1920년대 전간기 자본주의 명암을 모두 보여주는 곳이 바로 '뉴욕'이다. 명이라 함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세계가 입은 경제적 피해들을 미국의 자본이 풀리며 해결함으로서 당당히 세계 1인자로 거듭나는 것이겠고, 암이라 함은 위에서 설명한대로 그 속에 내포된 모순성이라 할 수 있겠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비인간적이지만 효율적'인 시스템 속에서 이런 극단적 모순성을 대표하는 게 제이 개츠비가 아닐까 싶다. 군대 제대 후 무일푼이었던 그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비인간적이지만 효율적'인 불법 사업들이었기 때문이다. 

 

 

닉이 개츠비를 좋아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답은 쉽다.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다 못해 찌들어있는 위선적인 부유층들과는 비교되는 뚜렷한 순수함(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몰래 외도를 저지르긴 했지만, 데이지를 꼬드겨(?) 이혼을 하게 한 뒤 자신과 살자고 할 계획을 세운다. 순수하기 때문이다. 제이는 데이지도 순수할 거라 믿었지만, 결국 데이지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해결해줄 수 있는 톰을 선택하고, 순수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다. 

 

어떻게 보면 막장 불륜 문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다. 결국은 불륜일 뿐인데 순수한 사랑이라고 미화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톰도 바람둥이였기 때문에 닉이 데이지에게 대놓고 구애하는데 어느 정도 정당성 아닌 정당성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영화에선 이러한 설정에 정당성을 더욱 명확하게 부여하기 위해 톰과 제이를 더 개새끼로 만드려고만 한다. 영화에서는 '원래 개새끼들이라,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무튼 간만에 재미있는 소설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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