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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 -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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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씨 고문살해사건에서 6월 항쟁에 이르는 격동기에 군사독재정권 타도투쟁을 선동하는 유인물을 찍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곰팡내 나는 반지하 자취방에 숨어 지내면서 썼다. 하루 종일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돌을 던지고 돌아와 밤새워 했으니 점잖고 온순한 글이 나올 수야 없는 일이다." - 머리말 中

 

  유시민은 이 책의 초판을 1988년, 즉 그가 30살이 되던 해에 출판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 그리고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을 읽으며 '똑똑한 사람이 글까지 잘쓰면 이런 글이 나오는구나'고 생각했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도 '똑똑한 동시에 글도 잘 쓰는 사람이 쓴 책'의 목록에 추가했다.

  80년대 당시엔 소위 '지식인'이라는 명확한 특정 계층이 있었을 것이다. 일단 독재 정부에 의해 정보가 통제되던 시기였고, 지금과 같은 인터넷이 없었으니 책이나 강의를 통해서만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전문 지식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대중적이고 접근성이 좋지 않았을 테니까. 당시에도 유시민같이 똑똑한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잘 쓰는 똑똑한 사람은 그보다 적었을 것이며, 그들 중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글을 쓴 사람은 더더욱 적었을 것이다. 이렇게 역경 속에서 훌륭한 글을 쓴 예시로 내게 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일제강점기 수난 속에 글을 쓴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과 신채호 선생이다. 조선어학회의 연구자들도 떠오른다.

  아무튼 유시민은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위해 몸으로 투쟁하는 동시에 글도 썼다. 정말 멋지다. 그리고 동시에 부끄럽다. 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나도 이정도의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참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당시의 유시민보다 편안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말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정말 많은 사건들을 다루는 책이지만, 그중 가장 가슴에 와닿은 부분은 419혁명을 다룬 부분이었다. 유일하게 한국의 역사를 다루는 탓일까. '그때 확실하게 친일파 청산을 했더라면...'과 같은 무의미한 가정을 곱씹었다.

 

  419혁명당시 운동의 주체자들은 대부분 중고등, 그리고 대학생들이었다. 이후 80년대 전두환의 독재 시절에도 학생들이 많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그에 반해 요즘엔 학생의 정치 관심도 낮다. 단순히 투표율만 보아도 20대의 투표율이 가장 낮다. 대체 왜일까?

  사회가 안정화되며 자연스레 관심을 가질 일이 없어진 결과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당시엔 '독재'라는 공공의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박근혜의 국정농단 시절 촛불시위를 이끈 건 학생이 아니었다. 박근혜의 국정농단은 학생들에게 훌륭한 공공의 적이 되지 못한걸까?

  아니면 기득권 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는 것일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무관심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왜 현재 기득권 세력이 젊은 세대에 정치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정도는 할 수는 있지 않을까? 교육 제도를 조금씩 바꾸는 식으로 말이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그 누구보다도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던 현재의 기득권들은 왜 20대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단순히 기득권 세력의 문제라고 치부할 순 없지만, 개인적으로 지금의 세상은 그들이 세운 민주화의 토대 위에 그들이 직접 쌓아 올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 모두 말이다.

  혹은 정치에 쏟던 관심을 다른 분야에 쏟는 것이 아닐까? 그럴 법 하다. 90년대를 지나며 한국의 대중문화가 급격히 성장했으니 말이다. 90년대 압구정동의 '오렌지족'이 정치에 큰 관심을 가졌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문화 뿐만 아니라 입시 경쟁이나 취업 경쟁이 너무 심해진 탓도 있으리라. 당장 내 공부하기 바쁜데 주변을 살필 여유가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이유가 되었건 너무 안타까운 현실이다. 독재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학생들의 활발한 정치 참여는 꿈꿀 수 없는 것일까?

 

 

 

  드레퓌스 사건이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에 관한 내용들, 그리고 독일의 통일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처음 들어보는 내용들이었다. 또한 그 외 원래 알던 내용들이라도, 기존의 역사를 대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탓에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 내용도 많았다. 그리고 얼치기로 알고 있었던 중국 국공내전이나 베트남전쟁, 말콤X가 대표하는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 등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래도 20세기 중후반 끊임없이 미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는 사회주의와 관련된 역사(러시아 혁명이나 베트남 전쟁 등)를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비주류 역사를 비중있게 다뤘기 때문에 내게 새롭게 느껴지는 점이 많았을 것이다.

 

  유시민의 다른 책인 <역사의 역사>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이후 유시민이 쓴 다른 책들을 찾다가 역사에 관한 책이 있어 고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좋은 선택이었다. 나를 겸손하게 하는 책이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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