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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책

역사란 무엇인가 - E. H. 카 :: 역사 철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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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때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샀다. 그땐 딱히 읽고싶다는 욕망이나 읽어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산 건 아니었고 그냥 유명하니까 샀던 것 같다. 언젠간 읽겠지... 하는 마음으로.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뒤로 여러 역사책들을 읽다보니 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정말 너무도 많이 인용되더라. 그 유명함은 역사에 관심이 없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역사라는 분야에서 이 책의 중요도가 이정도였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작년 초쯤에 읽으려 시도한 적이 있는데 첫 몇 장을 읽고는 바로 손을 들었다.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와 이 책을 함께 읽고 독서 토의를 해보자는 각오 하에 2021년의 시작과 함께 꾸역꾸역 읽어냈다. 혼자 읽었으면 다시 한번 손을 들었을 것이지만 독서 토의라는 목적을 잡아두고 읽으니 어찌어찌 읽게 되더라.

 

박종국님이 옮긴 육문사판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이 출판사를 고른 건 아니고 그냥 20살때 산 책을 그대로 읽은 것이다. 다른 출판사의 번역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이 육문사판은 번역투가 정말 매우 심해 가독성이 최악인 나머지 읽기가 더욱 힘들었다. 2011년에 개정 3판된 책인데 이정도라니 많이 당황스럽다.

 

책의 내용 자체는 재미가 없었지만 굉장히 논리적으로 구성되있었기 때문에 읽을 맛은 났다. 책은 단 하나의 주제를 관통한다.

역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책의 각 여섯 장은 이 주제를 각기 다른 소주제의 관점에서 바라본 내용을 담고 있다.

 

1.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책을 다 읽고 나니 사실상 1장에 이 책의 모든 주제들이 집약되어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 할 때 우리의 대답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과 그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반영한다.

여기서 '사실'이란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은 역사가들이 어떠한 사실에 관심을 가졌을 때 비로소 '역사적 사실'이 된다. 한마디로, 많고 많은 사실들 중 '역사적 사실'을 골라내는 것이 역사가가 할 일이다. 역사가의 임무는 '사실'들 중에 가치를 발견해 재평가하는 일이지,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임무가 아니다.

 

19세기의 역사관 : 

"문서"와 "사실"을 존중하며 실증주의 토대의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숭배했다. 왜 이 시대의 역사가들이 역사 철학에 무관심 했느냐 하면, 역사의 의미란 논란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자명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역사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19세기를 휩쓴 경제 사조인 자유 방임주의에 역사가들도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들어 새로운 논의가 시작된다.

콜링우드 : 역사란 '과거 자체'나 '과거 자체에 대한 역사가의 사상' 그 어느 것과도 상관이 없고, 이 둘 간의 상호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1. 역사의 사실들은 그것을 기록한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항상 왜곡(굴절)된다.

2. 역사가는 사실만을 취급할 게 아니라 그 배후의 일들이나 사상, 심리를 상상하며 이해해야 한다.

3.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볼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사실이 없는 역사가는 무의미하고 역사가 없는 사실 또한 무의미하다.

 

2. 사회와 개인

역사는 개인(현재 속에 있는 역사가)이 쓴 여러 개인(사회)에 대한 기록(과거의 사실)이다.

- 역사가 : 사회에서 고립지 않고  영향을 받은 개인. 역사가도 역사의 일부이다.

역사 과정은 움직이는 행렬과 같다. 여기에서 역사가는 이 행렬을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독수리나 사열대 위의 주요 인물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행렬 속에서 행렬과 같이 움직이는 작은 인물에 가깝다.

- 역사 연구의 대상 : 역사적 사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실들

역사가의 연구 대상은 '개인의 행동'이어야 하는가, '사회적 힘의 작용'이어야 하는가?

-> 과거엔 후자가 인기 있었다. 쉽기 때문에. (ex) 공산주의의 사회·역사적 기원을 분석하는 것보다 마르크스 개인의 천재성이라고 설명하는 게 쉽다)

그러나 역사는 '사회 속에 존재하는 개인'의 과거에 대한 연구이다. 개인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결론 : 역사는 사회적 과정이고, 개인(역사의 연구 대상으로서의 개인이든 그 연구를 하는 역사가이든)은 사회적 존재로서 역사에 참여한다

 

3. 역사와 과학과 도덕

나는 이 장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생각해볼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장은 '역사는 과학이라 할 수 없다'라는 주장에 대한 카의 반박이 주를 이룬다.

 

또한 역사와 도덕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논한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제도·정책등에 대해선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역사적 인물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카를 공감할 수 없었는데, 카는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기에 히틀러나 스탈린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고 했다. 그 이유(를 굳이 적진 않겠다)가 납득이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이것에 도덕적 판단에 대한 회피로 보였다. '그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역사적 개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사회상과 개인'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한다는 말인가? 카도 이 점을 지적하며 "이것은 현대사가들이 당면한 하나의 난점, 아니 최대의 난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고 했다. 

 

결론 : 역사가가 역사를 연구하는 방식과 과학자가 과학을 연구하는 방식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역사도 과학의 일부이다.

 

4. 역사의 인과관계

역사는 원인의 연구이다.

원인1 : 자유 의지에 따르는 인간의 행동에 의한 원인

원인2 : 우연적인 원인 : 역사가가 합리적 우연과 아닌 것을 분별해야 함.

또한, 역사가는 목적을 갖고 역사적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 (원인을 파악함과 동시에 목적도 가져야 함)

역사가는 '왜?'라고 묻는 동시에 '어디로?'라고 묻는 법이다.

 

5. 진보로서의 역사

진보 ≠ 자동적, 절대적, 필연적 과정

진보 = 인간 능력이 계속해서 발전하는 과정을 진보라 한다. 전진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전진 자체를 진보라고 할 순 없다.

객관성 = 사실(역사적 사실)과 가치(자유, 평등 등...)의 상호작용을 따져야 얻을 수 있다.

+ 방향감각도 수정하면서 판단해야 한다.

 

5장은 전체적으로 이해가 잘 안됐다. 객관성과 방향감각은 왜 등장한 건지 몇번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6. 넓어지는 지평선

3장 다음으로 재미나게 읽은 6장. 카는 20세기 중반의 급격한 변화 두 가지를 설명한다.

1. 인간이 이성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 (깊이 변화의 측면)

2. 국제 질서의 지리적 변화, 세계의 외형상의 변화 (지리적 넓이 변화의 측면)

1에선 인간이 이성을 자각하고 탐구해온 역사를, 2에선 세계의 주도권이 영어권 서방 세계에서 아시아쪽으로 넘어가는 현재 상황을 설명한다.

2를 읽다가 소름 돋은 부분이 있다.

유럽이 '변화 없는' 곳이 되어 버렸고, 아시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서유럽과 북미대륙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들은) 과거에 대한 뼈저린 향수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카는 특히나 미국과 영국을 염두해두고 이러한 문장들을 썼다.

얼마 전 바이든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긴 했지만 이전 4년간 미국은 트럼프를 지지하며 과거의 영광을 찾으려 고립주의로 돌아서려 했다. 또한 영국도 이와 비슷하게 각개화의 길을 걷는 브렉시트를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변화 없는' 곳, 혹은 과거에 대한 뼈저린 향수에 몸을 맡긴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는 와중 중국은 무섭도록 성장해 이젠 미국과 어께를 나란히하는 당당한 G2로 성장했다.

카가 이 책을 집필했던 60년 전과 구체적 상황만 다를 뿐 저 문장의 메타포는 현시대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읽으며 계속 '그말이 그말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결국 한 주제를 관통하는 내용이기에 그말이 그말 같다고 느꼈다는 것은 저자가 책을 논리적으로 잘 썼다는 것에 대한 방증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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